전근대 해운(海運)의 거점 경기만 | 경기만 에코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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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해운(海運)의 거점 경기만

본문

선사시대를 거쳐 고대로 접어들면서 바다는 점차 어업이나 상업이라는 생활의 터전에 머물렀던 것에서 벗어나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전방위에 걸쳐서 중요한 자원이 되었으며, 문명의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의 3지역 간에는 70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해양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남 창녕군 비봉리에서 8000년 전에 사용한 목선을 발굴하였고,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암각화 등은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동해를 이용한 원거리 항해와 포경업이 성행했음을 입증한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서해 북부해안을 끼고 발전하였는데, 특히 요동반도와 서한만, 대동강 하구지역을 중심으로 해양문화가 발달하였다. 인천시 영종도는 초기철기시대(BC 300~0) 및 원삼국시대(0~300)에 서해안 연안항로의 거점이자 국제교역항이었다. 최근에 영종도 북동쪽 해안가인 운북동 유적에서 오수전(五銖錢) 17점을 비롯하여 낙랑식 화살촉 22점과 낙랑계 토기편들이 발견됨으로써, 이곳이 당시에 국제 교역항으로 이용되었음이 밝혀졌다. 오수전은 중국에서 BC 118년에 주조가 시작되어 수나라 때까지 제작되었으며,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발견되는 국제적인 화폐로 남해안 여러 곳에서 출토된 바가 있다. 한편 한반도의 남쪽에는 3한의 소국들이 있었다. 이 소국들은 삼국지(三國志)·후한서(後漢書) 등의 기록에 의하면 해상활동이 활발했다. 소국들은 중국 및 일본 열도의 소국들과도 정치적·경제적으로 교섭하였는데, 이는 물론 해양교섭이었다. 이 소국들은 대부분 해안 또는 강 하구에 위치한 일종의 도시국가였다.



삼국시대
삼국시대 고구려는 해양활동이 가장 활발했으며, 그것을 국가발전에 효율적으로 활용하였다. 동천왕 때인 233년 양쯔강 하구 유역의 오나라와 교섭한 이후 황해를 남북으로 오가며 중국의 남·북조 국가들과 활발한 접촉을 이어갔다. 광개토대왕 시대에는 수륙양면작전을 구사하여 한강을 공략하고 경기만을 장악하였다.
백제는 비류(沸流)와 온조의 정착과정도 해양과 관련이 깊다. 인천은 미추홀이며 백제 초기에 비류가 도읍하였던 곳이므로 백제도 이곳에 교역을 위한 포구를 운영하였을 것이다. 시기는 늦지만 18세기의 문헌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인천부의 대진(大津)이 중국으로 가는 백제 사신의 발선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대진은 한진(漢津)으로도 표기되며, 그 위치는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의 능허대공원 주변으로 현재는 육지화 되었다. 백제의 첫 수도였던 하남위례성(풍납토성으로 비정됨)은 일종의 하항(河港)도시였다. 백제는 초기부터 해양활동 능력을 기반으로 나라를 발전시켰으며, 해외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특히 4세기에 들어와 서해 중부의 해상권을 장악하였고, 마한을 정복하고 서해 남부지역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일본열도에 진출하였다. 금강 하구에서는 서해를 횡단하여 산동반도 해역권에 진입한 다음에 남행하여 양자강 하구로 가거나, 직접 서해 남부를 건너 양자강 하구로 들어가 중국의 송(宋)·제(齊)·양(梁)·진(陳) 등 남조국가들과 활발하게 교섭하여 국가로서의 위상을 격상시키고 문화의 발전을 이루었다. 일본열도로의 진출은 더 활발해져 일본에서 고대국가가 성립하고 불교 등 문화가 발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는 초기에는 해양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수도인 경주는 내륙에 위치한 도시가 아니라 바다로 이어진 일종의 해항(海港)도시였다. 일본·가야와의 해전을 치른 후 뒤늦게 해양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의 강화를 추진하였다. 512년에는 동해를 건너 우산국을 정벌했고, 낙동강 하구를 장악하였으며, 6세기 중반에 들어와 경기만을 차지하였고, 이것을 이용하여 중국지역과 교섭을 빈번하게 하였다. 당은포(唐恩浦, 지금의 경기도 화성)는 6세기에 신라의 대당(對唐) 교역항으로 처음 개발되었다. 553년(진흥왕 14)에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아 서해를 통하여 중국과 교섭할 수 있는 항구를 개척하였는데 바로 당은포였다. 이후 당은포는 신라의 가장 중요한 교역항으로 운영되다가 나말 여초에 이르러 예성항에 그 지위를 물려주었다. 당은포는 8세기말 신라 방면 종착항으로서 당나라 사신선이 여기에서 상륙하여 왕성(경주)으로 향했던 곳이다. 간혹 당항성(黨項城)을 한성시대 백제의 교역항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당항성은 시대에 따라 당성진(唐城鎭)·고당성(古唐城)·당성(唐城) 등으로도 불렸는데, 지금의 명칭은 당성이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 당성 부근에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포구를 개설하였는데 그것이 당항진(黨項津), 곧 당은포였다. 한성시대 백제는 인천과 강화도 등 한강 하구 유역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 향하는 사신선을 굳이 인천보다 훨씬 아래쪽인 당은포에서 출발시킬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전근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대양항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서해 북부 연안항로, 둘째 서해 중부 횡단항로, 셋째 서해 남부 사단(斜斷)항로가 그것이다.
서해 북부 연안항로는 고대에 주로 이용한 항로로 노철산(老鐵山) 항로로도 부른다. 이 항로는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고려, 조선까지 줄곧 이용되어 온 가장 오래된 항로로서 고대 기록에 노철산 수로(水路)로 표기되어 있다. 이 해로는 산동반도 등주(登州)를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발해만의 노철산 하구를 거쳐 대련만(大連灣)의 동쪽을 지나 압록강 하구에 이른다. 여기에서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대동강 하구와 초도를 지나 옹진만(瓮津灣)과 강화도 덕적도를 거쳐 남양만에 이른다. 이 뱃길은 552년(진흥왕 13)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로 때로는 고구려, 백제의 방해로 막히기도 하고 위협받기도 했으나 멸망할 때까지 중단 없이 이용되었다. 이 항로는 대양을 통과하지 않고 연안을 통해 중국으로 가는 항로로, 가장 순탄하여 소형 선박들이 안심하고 항해할 수 있었다.
서해 북부 연안항로는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전에 따라 대양을 통한 직선항로로 발전했는데, 그 항로가 바로 서해 중부 횡단항로이다. 이 항로는 한반도의 중부지방, 즉 경기만 일대와 산동반도에서 각각 서해로 돌출한 가장 가까운 지점을 연결하는 항로이다. 이중 하나는 황해도의 장산곶, 옹진, 백령도로부터 지금의 산동성 위해(威海) 또는 석도진 적산포에 도달하는 항로였다. 황해도의 육지에서 산동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250km이다. 고구려 전성기, 백제 전기, 그리고 고려 전기에 활용한 항로이다. 또 하나는 남양만에서 출발하여 등주 지역이나 그 아래인 청도만의 여러 항구로 도착하는 항로이다. 늦봄에 부는 남풍계열의 계절풍을 이용하면 옹진에서 횡단하는 것보다 시간을 더 걸릴 수 있지만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다. 고구려 전성기, 백제의 웅진시대, 신라, 통일신라, 고려 중기 등에 골고루 사용한 항로이다.
이 항로는 중국에 도달하는 시간이 단축되고 비용이 훨씬 적게 들었다. 660년(무열왕 7)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침공할 때 산동반도 등주에서 출발, 이 항로를 이용하여 덕적도로 진출했다.
나침반이 항해술에 적극 도입되면서 서해 남부 사단항로가 등장했다. 사단이라는 것은 비스듬히 가로지른다는 뜻이다. 이 항로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청해진, 흑산도에서 중국 동남부 지역인 양쯔강 하류까지의 동남 중국해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노선이었다. 이처럼 한반도는 연안항로를 통해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를 매개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런 관계로 해상 교역의 주도 세력은 대개 한반도에서 대두되었다. 한성백제 시기 백제가 장악한 경기만 지역은 해상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뿐 아니라 중국을 잇는 최단 교역로 확보로 번성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의 남하정책으로 백제는 한강을 빼앗기면서 금강 유역으로 후퇴했고, 고구려 수군은 서해 해상권을 장악했다. 백제는 동진(東晋)과의 교섭을 위해 서해 중부 횡단 항로를 활용하였으며, 전기에는 황해도 남부를 기점으로 하였으나 고구려에 의해 한강 하구가 봉쇄당하자 화성 남양만 일대에서 출발하여 덕적군도를 경유하는 항로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는 위치상 중국과의 교류가 여의치 않았다. 초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승인 내지 협조로 중국과의 교류가 가능했다. 신라가 독자적으로 중국과 직접 교류하여 국제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564년(진흥왕 25) 북제(北齊)와의 교역이 처음이다. 이때 신라는 중국으로 나아갈 중요한 항구인 남양만의 당은포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바닷길을 통해 중국과의 교류가 가능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신라와 당의 교류는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항로를 이용해서 당과 통일신라·발해·일본을 연결시켰다. 통일신라는 초기부터 대외적으로 해양활동이 빈번했고, 앞서 언급한 세 해로를 통해 넓은 지역과 광범위한 무역을 전개하였다. 서해 북부 연안항로는 비교적 안전한 항로로 552년(진흥왕 13)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유한 뒤로 멸망할 때까지 중단 없이 이용되었다. 서해 중부 횡단항로는 해류와 풍향을 이용한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신라와 중국으로 연결하는 보편적 항로로 이용되었다. 820년(헌덕왕 12)경 왕자 김흔(金昕)이 당나라에 갈 때 당은포에서 서해를 횡단하여 산동의 지부(芝罘)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항해술은 연안 항해 시에는 주로 조류를 활용하고, 원양을 항해할 때는 계절풍을 이용했다. 서해의 경우 겨울철(12~2월) 바람은 북서 및 북풍이 주류를 이루며, 봄철(3~5월)이 되면 점차 남풍으로 바뀐다. 여름철(6~8월)에는 서남풍이 불며, 가을철(9~11월)에는 남풍이 다시 북서풍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신라에서 당으로 출발하는 시기는 가을철이 가장 적당하며, 당에서 신라로 오는 시기는 늦은 봄에서 여름철이 가장 적합했다. 법흥왕 이후 중국 남조와의 교역이나 많은 학승들의 당나라 출국도 이와 같은 계절풍을 잘 이용했다. 그러나 9세기 이후에는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역풍을 이용한 항해도 많아졌다. 장보고(張保皐)가 완도의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신라의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9~10세기 청해진에 해상 왕국을 건설한 장보고는 신라-당-일본의 삼국 무역은 물론 서방 이슬람 세계와의 무역도 장악하여 동아시아 무역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신라의 대중국 교통의 중심, 당성(唐城)
당성은 현재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 구봉산(표고 165.7m)에 위치한 산성이다. 1971년 사적 217호로 지정되었다.
당성이 위치한 구봉산 자락은 남양반도 중앙부에서 서남쪽의 바다 방향으로 비스듬하고 길게 늘어서 있다. 해발 고도로 보면 그다지 높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서해안 일대의 풍광이 잘 관찰된다. 지금은 시화방조제와 각종 매립사업으로 육지처럼 변하거나 원래는 섬이었던 지역이 뭍으로 연결된 곳이 많지만 과거 해안선을 유추해 보면 서해에 면한 크고 작은 섬들이 잘 조망되는 위치였기에 바다로부터 접근하는 적들과 각종 교역선들을 잘 바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성 내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여러 시기에 해당하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와 돌을 갈아서 만든 석촉, 돌끌과 같은 석기유물이다. 청동기 시대의 일반적인 주거 유적은 강가의 언덕이나 내륙의 야트막한 구릉지에서 확인되는데 당성 내부에서 이런 유물들이 출토되는 점에서 보면 당성이 위치한 구봉산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중요한 관방 요새처럼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기와와 토기가 출토되었다. 역사적으로 진흥왕대 이후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통일신라시기의 유물들로는 문양이 찍힌 암키와와 토수기와가 주를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자기류 등도 출토되어 이 시기에도 당성은 지속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성은 삼국시대 이후 중국으로 가는 세 개의 항로의 기점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산동반도로 직행할 수 있는 서해 중부 횡단항로가 당성과 가장 관련 깊다. 지금의 마산포나 화량포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 항로는 황해도에서 출발하는 것보다는 안정적이었던 것 같다. 특히 신라가 이 항로를 애용했다. 북쪽은 고구려, 남쪽은 백제의 압박을 받고 있던 신라로서는 서해안을 따라도는 연안항로를 사용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강화-백령도를 거치는 횡단항로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항로와 당성이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항로와 항구가 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당성은 신라에서 제일 중요한 대중국 무역항이자 교통로였다.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신당서』에는 중국과 신라가 통교하는 공식 항로로 이 항로가 기재되어 있다. 당성은 6세기부터 신라가 멸망하는 10세기까지 약 400년간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이자 무역항으로 기능했다.(경기도·경기문화재단, 2009, 『당성』 참조.)

고려시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호족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특히 서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한 해상세력의 협조는 후삼국 통합에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다. 왕건은 통일 전부터 후백제와 남중국의 오월(吳越), 민(閩) 및 일본과 해상을 통해 인적·문화적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러한 전통은 계속 이어져 고려 시기 전 기간을 통해 지속되었다.
송나라는 962년(광종 13) 고려와 관계를 맺은 이래, 공무역은 물론 민간무역이 두 나라 사이에 크게 성행했다. 현종 때에 이르면 송나라 상인들의 활동이 본격화 되었으며 문종 때를 전후한 시기, 즉 북송 말기에서 남송 초기에 가장 왕성했다. 송나라 건국 이후 약 260여 년간 고려에서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횟수는 57회, 반대의 경우는 34회이다. 그에 비해 송나라 상인이 고려에 온 횟수는 120회로서 3~4배 정도이며, 고려에 온 상인의 숫자는 최소한 5,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수치는 상인들이 고려 조정에 물건을 바쳐 기록에 남은 경우이며, 그렇지 않은 송나라 상인의 고려 방문은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고려와 송나라의 항로는 북송의 신종(神宗) 원풍기(元豊期, 1078~1085)를 기점으로 전·후기로 나누어진다. 전기는 산동반도의 등주와 밀주(密州)를 기점으로 하였다. 등주와 밀주는 각기 산동반도의 남과 북에 위치했다. 고려로 갈 때에는 등주에서는 2월 초의 서북풍을, 밀주에서는 여름 계절풍인 남풍을 이용하여 운항했는데, 도착 항구는 모두 옹진항이었다. 즉 서해 횡단 항로가 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송 후기는 거란이 북방에서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명주가 중심이 되었다. 당시 고려사절은 밀주를 거쳐 경동로(京東路)를 통해 수도로 들어가는 ‘동로’와 명주에 도착한 다음 양절로(兩浙路)를 거쳐 변하(汴河)를 거슬러 올라가는 ‘남로’가 있었다. 고려사절은 주로 남로를 이용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짐이 많아서 육로보다는 선박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즉 고려사절은 남로, 즉 서해 사단 항로를 주로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주는 정부 간 항로로 개통되기 이전에도 민간 상선의 왕래가 활발했던 곳이었다. 명주에서 예성강까지의 항로에는 고려는 물론 송나라의 대형 원양 함대가 항해함으로써, 고려-중국 간의 항해에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한편 고려시대부터는 조운(漕運)이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조운은 현물로 거둬들인 각 지방의 조세를 선박으로 왕도까지 운반하던 제도를 말한다. 고려 이전에도 지방의 조세곡(租稅穀)이 중앙으로 운송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삼국과 통일신라 시기에 조운 제도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집약적으로 조직되었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찾을 수 없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중앙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운과 역참(驛站)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고려의 조운제는 건국 초기 연안과 강변의 60개 포구를 거점으로 활용하여 조세를 운송하면서 시작되었다. 60개 포창(浦倉) 중 경기만 일원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포창은 다음 표와 같다.

<표> 경기만 일원에 설치된 고려시대 포창
포창명(浦倉名)『대동지지』에 기록된 지명고려 지명[漕倉]현재 지명운송방식
고총포(古塚浦)안산군(安山郡)안산(安山)경기 > 안산강운
편섭포(便涉浦)아주(牙州)[河陽倉]직산(稷山) 경양포(慶陽浦)경기 > 평택해운
미풍포(媚風浦)한남군(漢南郡)수원(水原)경기 > 수원해운
식랑포(息浪浦)한남군(漢南郡)수원(水原)경기 > 수원해운
덕양포(德陽浦)덕양군(德陽郡)고양(高陽)경기 > 고양강운
영석포(靈石浦)덕양군(德陽郡)고양(高陽)경기 > 고양강운
거안포(居安浦)김포현(金浦縣)김포(金浦)경기 > 김포강운
자석포(慈石浦)김포현(金浦縣)김포(金浦)경기 > 김포강운
광통포(廣通浦)공암현(孔巖縣)양천(陽川)경기 > 김포강운
양류포(楊柳浦)김포현(金浦縣)김포(金浦)경기 > 김포강운
심축포(深逐浦)시흥군(始興郡)시흥(始興)경기 > 시흥강운
단천포(丹川浦)시흥군(始興郡)시흥(始興)경기 > 시흥강운
고려 때 정비된 조운 제도는 조선시대까지 약 1천년 동안 조세와 공물을 수취하는 근간으로 기능했다. 고려 현종 때는 12조창(漕倉) 체제로 개편되었다. 국가에서 조창을 건설하고, 조창 주변 지역의 조세곡을 조창에 한꺼번에 수납했다가 국가 소속 조운선으로 개경까지 운송하는 제도였다. 12조창 중심의 조운제도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이전보다 강화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문종 때에는 13조창으로 확대되었다. 경기만은 고려시대 각지의 조창에서 수송되어온 조운선이 모여드는 종착지였다.
고려의 뱃길은 조운을 위주로 하는 연안 항로가 그 근간이다. 특히 서해안의 연안 항로에는 주요 지점에 객관을 설치하여 개경에 이르는데 불편함을 완화하였다. 객관은 각 주현에 공공시설의 일부로서 만들어져 있었던 것으로 대략 조선시대의 객사에 준하는 시설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빈객의 접대가 주 업무이고 국왕의 진영이 모셔져 각종 의례의 시행 공간이 되었다. 특히 송의 사신단이 이용할 경우 국왕에게 전달되는 조서를 임시 안치하는 것도 중요한 기능이었다. 서해 연안 해로에의 객관 설치는 이같은 일반적인 객관 제도를 해로의 요충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송나라의 국신사(國信使)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서해안 해로에는 군산도(선유도)의 군산정(群山亭), 태안 마도의 안흥정(安興亭) 다음에 자연도(紫燕島, 영종도)의 경원정(慶源亭)이 있고 예성항에는 벽란도에 벽란정(碧瀾亭)이 설치되어 있었다. ‘정’이라고 하면 보통은 경치 좋은 곳에 지은 휴게용 건축을 일컫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원래 ‘정’이라는 시설은 숙식 등을 해결하는 고려시대의 원과 유사한 점이 있었던 것 같다. 아래 그림은 서긍이 사행로로 이용했던 마도에서 자연도까지의 항로를 추정한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 강화도로의 천도와 몽골전란기 40여 년(1231~1273)은 연안 항로의 비중을 절대적으로 높이는 것이었고, 동시에 강화 이외 연안 섬들의 존재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강화 천도에 의하여 강도는 개경의 지위를 지칭하는 ‘황도’로 칭해지기도 하였다.

고려의 국제항, 벽란도(碧瀾渡)
예성강은 황해도 고달산(高達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를 따라 흘러 황해로 들어가는데, 이 일대는 산지 지형에 가까워 강의 흐름이 비교적 빠르며 바다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조수가 밀려드는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물이 깊어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으며 고려시대의 수도였던 개성과 가까이 위치하였던 관계로 벽란도는 고려 시대 제일의 하항이자 실질적인 유일의 국제 항구로서 발전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의 송나라 상인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하여 멀리 남양지방(南洋地方)과 서역지방(西域地方)의 해상들까지 자주 드나들며 교역을 하였던 곳이다.
당시 물길을 따라 개성에 들어오는 세 갈래 길이 있었다. 첫째는 임진강 지류인 사천(동강)을 통해 들어가는 길, 둘째는 개성 남쪽 40여 리 떨어진 곳의 승천포(강화도 승천포와 마주보고 있음)를 통해 가는 길, 셋째가 예성강을 통해 들어오는 길이 바로 벽란도가 있는 길이며, 이 셋째 길이 가장 인기 있는 길이었다고 한다. 또한 벽란도는 중국에서 육로로 개성을 오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의 나루터였다. 조선시대에도 중국으로 갈 때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황해도의 교통요지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예부터 고구려와 백제는 이 땅을 놓고 싸우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 항구 언덕 위에 벽란정(碧瀾亭)이 있었는데 송나라 사신들이 오면 반드시 묵고 가는 접대장소였다. 원래는 예성항이었는데, 이 벽란정 때문에 별명 벽란도가 항구 이름으로 굳어졌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중요한 무역항이며 국제항이자 교통의 요지였던 벽란도의 기능은 조선시대에 들면서 점차 그 역할이 감소되었다. 더구나 철도교통을 비롯하여 육상교통이 발달하고 다른 항구들이 개항을 하게 되자 그 역할은 더욱 축소되었으며 마침내는 그 역할을 거의 상실하였다. 그러나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조선 왕조는 명나라의 해금(海禁)59 정책을 계승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행로는 육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사신이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간 경우는 1620~30년대 후금(後金)의 흥기로 명과 조선 사이에 육로가 차단되었던 시기가 유일하다. 20여 차례의 조선후기 해로 사행 중에서 대표적인 사행인 1636년 김육(金堉) 일행의 경로를 보면 육로로 평안도까지 이동한 후 선사포에서 요동반도 동쪽의 섬들을 끼고 항해하다가 등주로 상륙하는데, 서해 북부 연안항로를 일부 이용한 경로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만을 출발하는 대중국 사행 해로는 사용되지 못하였으나, 연안 항로는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조운제의 거점으로 횔용되었다. 경기만은 연안 항로를 따라 남쪽에서 올라오는 조운선들이 이동하는 경로였다.
고려 성종-문종 대에 걸쳐 완성된 고려의 조운제도는 삼별초의 봉기, 몽골의 일본 원정, 왜구의 침입 등을 거치며 점차 무너져 갔다. 조운제도의 붕괴는 곧 국가 재정의 파탄으로 이어져 공민왕과 우왕 대에 이르러서는 국고가 바닥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려 말 위화도 회군이후 이성계와 혁명파 사대부 세력은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 전제를 개혁하는 한편 조운을 부활하였다. 이렇게 재개된 조운제도는 조선 건국 이후 여러 차례의 정비를 거쳤으며, 성종 대에 이르러 조창과 관선을 토대로 하는 고려식을 계승한 새로운 조운제도를 완성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고려시대 13개 조창을 9개 조창 체제로 축소하여 법제화하였다. 조운은 운영 주체에 따라 관선 조운과 사선 조운으로 나뉘고, 운송 경로에 따라 해운과 참운(站運)으로 구분되었다. 고려시대 13조창 중에 해운창은 11개소, 강운창은 2개소였는데, 조선시대에는 해운창이 4개소로 대폭 감소했고, 강운창은 5개소로 늘어났다. 조선전기 해운창이 대폭 감소한 까닭은 여말 선초 서남해안에 왜구의 침탈이 잦았기 때문이며, 어쩔 수 없이 강운창 중심의 조운 체제를 운영하게 되었다. 각 조창에 수납된 세곡은 경창에 집결했는데, 충청·전라의 조세곡은 경기만의 연안항로를 따라 이동하여 한강의 서강에 위치한 광흥창과 풍저창에 수납되었다. 황해도 지역의 세곡은 배천의 금곡포창(金谷浦倉, 황해도 연백군)에 수납하였다가 예성강과 한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임진왜란 때 호남을 제외하고 붕괴되었던 조운제는 광해군 시기부터 점차 복구되었으며, 1608년부터 시행된 대동법(大同法)으로 인해 조세곡 운송량은 대폭 증가하였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충청·전라 지역에서 조운 제도가 쇠퇴하고 임운(賃運, 운임을 받고 곡식 등을 운반하던 제도) 상납이 보편화되어갔다. 이는 세곡 운송량이 대폭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운선이 그만큼 증가하지 않은 점이 중요한 원인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조운 제도에 비해 임운 상납 제도가 훨씬 효율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관선의 운송비는 운송량의 3분의 1을 차지했지만, 사선인 경강선의 임운 상납 경비는 운송 거리에 따라 운송량의 10~20%에 불과했다. 조운선은 최근접 연안항로를 택하여 운행했다. 운항 속도는 바람과 날씨에 따라 달라졌을 것이나, 법전류에 명시된 항해 기한은 충청도 옥구 군산창에서 광흥창까지 17세기 중후반은 25~30일이었으나 18~19세기는 20일로 단축된다. 그러나 읍지류에 나와 있는 자료를 확인하면 옥구에서 광흥창까지 10일이면 도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법정 기한이 실제 기간에 비해 2배 정도 여유를 둔 규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운선은 중간에 참에서 점검을 받는 등,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였기 때문에 상선에 비해 운항 속도가 현저히 느렸다.
다음은 『석성읍지(石城邑誌)』에 실린 충청도 석성에서 수납한 조세곡을 경창까지 운송하는 데 거쳐 간 참(站) 중에서 경기만 관련 지역을 발췌한 것이다.
석성 저포(猪浦) →(중략)→서산(瑞山) 난지(蘭芝)→남양(南陽) 연흥(連興)→강화(江華) 영종(永宗)→치도(鴟島)→황산(黃山)→갑곶(甲串)→연미정(燕眉亭)→조강(祖江)→봉삭(鳳朔)→현암(玄岩)→신곡(薪谷)→행주(杏洲)→양주(楊州)→가을두(加乙頭)→서강(西江)→용산(龍山) 
대동법은 지역의 특산물을 가호(家戶)에 부과하여 공물로 수취하는 대신 전결 1결(結당 쌀 12말[斗]을 걷어 서울로 운송한 후 이 대동미를 다시 공인(貢人)들에게 지급하여 정부에서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게 하는 제도이다. 1608년부터 1708년까지 10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시행되었다.
한편, 조선은 『대명률(大明律)』의 해금 정책에 의하여 연해 주민들의 외양 항해를 금지했으나 주민들의 생계를 위해 연안 항해는 보장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후반에는 정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외양에서 고기잡이를 하다 표류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정부의 조처에 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외양 항해의 시도가 늘어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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