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의 침략과 수탈 경로였던 경기만 | 경기만 에코뮤지엄

경기만의 유산


외세의 침략과 수탈 경로였던 경기만

본문

19세기 제국주의의 등장 이후 경기만은 외세와의 충돌이 연이어 발생했다. 1866년 프랑스는 선교사가 처단된 것을 구실로 삼아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켜 조선 침략을 개시했다. 미국도 대동강 연안을 거슬러 올라간 제네랄 셔먼호가 약탈을 자행하자 이에 분노한 평양의 관민이 배를 불태워 버린 사건을 빌미로 1871년 강화도를 침입하는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일으켰다. 일본은 1873년 조선을 정벌한다는 악명 높은 ‘정한론(征韓論)’을 들고 나와 전쟁 준비에 나섰다. 1875년 9월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경기만 일대에 출몰시키고 강화도에 군인을 상륙시켜 반격을 야기한 후 정산도와 영종도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이처럼 경기만은 서울의 관문이라는 특성 때문에 한말 외세의 침략 경로가 되었다. 강화도조약 후 개항한 인천 등 개항장을 통해 영국 섬유제품을 비롯한 각종 양화(洋貨)가 쏟아져 들어왔고, 쌀·콩을 포함한 각종 곡물과 금은 대량으로 유출되었다. 풍도(豊島) 등 경기만에서는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의 패권을 둘러싸고 결전을 벌였고 일제강점기에는 경인선·수인선 등 교통시설을 이용하여 많은 물자들이 인천 등 경기만을 통해 외국으로 반출되었다.

 


 

병인양요 

병인양요는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병인박해)을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를 명분으로 하여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이다. 로즈(P. Roze)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은 구실이었을 뿐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는 것이 프랑스의 진짜 목적이었다. 1866년 10월 19일 프랑스군은 군함 3척을 인천 앞바다에 정박시키고 죽은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 9명에 대한 대가로 조선인 9천 명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10월 26일 프랑스군은 양화진(楊花津), 서강 일대에 진출했다. 조선 정부는 어영대장 이용희를 파견하여 한강 연안 경비를 강화하였고, 프랑스 함대는 지형 정찰만 하고 청나라로 돌아갔다. 

11월 17일 로즈는 7척의 군함과 일본의 요코하마에 주둔해 있던 병력을 포함한 1,230명의 해병대를 동원해 다시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勿淄島)로 진출했고, 20일 함정 4척과 해병대 일부가 강화도의 갑곶진(甲串鎭) 부근의 고지를 점령한 뒤 한강의 수로를 봉쇄했다. 이어 22일에는 전군을 동원하여 강화성을 공격, 함락시키고 서적 등의 약탈을 자행했다. 조선 정부는 이경하·이기조·이용희 등 장수들을 양회진·통진·광성진·부평·제물포 등 거점지역과 문수산성·정족산성 등의 방어기지에 파견하여 도성 수비를 강화하면서 프랑스군의 철병을 요구했다. 12월 2일 문수산성 부근을 정찰 중이던 프랑스군은 매복한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27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12월 13일 프랑스군은 다시 교동부(喬桐府)의 경기수영(京畿水營)을 포격하고, 삼랑성(三郞城, 정족산성)을 공략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500여 조선군의 매복공격을 받아 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게 되자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로즈는 판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12월 17일 1개월 동안 점령했던 강화성에서 철군하였다. 이 과정에서 강화도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금은괴와 서적, 무기, 보물 등을 반출해 갔다.

병인양요로 인하여 강화도에서 한강을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수로가 프랑스군에 의해 완벽하게 노출되었다. 프랑스군은 양화진을 오르내리면서 수로와 수심 등을 세밀하게 축정하여 해로도를 작성하였다. 이 해로도를 이용하여 프랑스군은 쉽게 강화도를 점령하고 한강의 입구를 봉쇄하였다. 프랑스군은 이 봉쇄를 통해 조운선의 출입을 막아 서울의 경제적 혼란을 야기하는 전술을 구사하고자 하였다. 이후로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이 강화도에 자주 출몰하였다. 이에 따라 외국군에 대한 방비책이 새롭게 마련되었다. 강화도를 비롯한 경기만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군비증강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특히 모든 조운선이 강화도 연해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강화도에 대한 위협은 서울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강화도는 외적의 서울 침입을 저지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곳 자체를 지켜야 하는 적극적인 임무가 새로이 부과되었다.

 

신미양요

1871년 5월 26일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 Rodgers)는 5척의 전함을 풍도 앞에 정박하고 작은 배에 병력을 나누어 강화도 인근을 정탐하였다. 미군은 남양부사에게 조약체결을 원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조선 정부는 6월 1일 미군이 강화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어재연(魚在淵)을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하여 방어토록 했다.

6월 2일 광성진 앞 염하에 집결한 미군 함대는 조선과 포격전을 주고받은 후 6월 10일에는 함포 지원을 받은 미군 650명이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조선군은 미군에 맞서 백병전을 불사하는 등 결사항전하였으나 패퇴하였다. 11일 미군은 대모산에 포대를 설치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으며, 조선군은 화력열세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덕포진으로 물러났다. 이 전투에서 조선측은 어재연 등 2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바다에 투신하였으며,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전투 이후 미군은 물치도로 퇴각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이 결사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자 더 이상의 협상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포로를 석방한 뒤 철군하였다.

신미양요는 미군이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양선을 몰아낸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고수하였으며, 일본이 여러 차례 통상을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강화도조약

1875년 9월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은 다음해인 1876년 1월 25일 경기 남양부 도리도 근처로 군함을 이동시켰다.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정보를 수집했으며 1월 29일에는 강화부 초지진 근처에 침입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도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조선에 개국을 강요하였다. 일본의 움직임에 크게 긴장한 조선 정부는 시원임대신회의(時原任大臣會議)를 개최하고 대책을 토의한 뒤에 신헌(申櫶)을 접견대관으로 임명하여 교섭에 대처하게 하였으며, 강화도를 회담 장소로 결정하고 정식회담을 열었다.

회담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열렸으며 마침내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 등의 주장과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의 권고, 고종의 적극적인 개항 의사에 따라 개국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1876년 2월 27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에게는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 등 특권을 주고 조선 정부에게는 일방적인 의무만을 규정한 철저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조약이 체결된 후 미국·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 등과 같은 외세가 조선과 조약을 맺고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약에 의거하여 1876년 부산, 1879년 원산, 1882년 인천을 개항하였다. 인천은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경기도라는 커다란 상품판매 시장이 있어 일본이 일찌감치 상권을 차지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의 쌀과 금·은 등이 빠져나가게 되었다. 또한 서구의 면방직 제품 수입으로 조선 상품판매시장을 독점했다.

 

인천 개항

강화도 조약에 의한 개항 시기는 원래 1876년(고종 13) 2월 시점부터 20개월 이내로 하도록 하였으나 6년이 지난 뒤 인천항이 개항된 데에는 그 사이에 국내 정세가 안정되지 못한 이유도 있으나 우선 조선정부가 개항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일본 측이 선뜻 항구 선정을 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었던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조약상 인천은 부산처럼 개항 대상 지역으로 분명하게 기록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일본이 조선 연안에 관한 상세한 해도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측에 의해 서해안 측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77년 가을부터였다. 일본 공사로 조선에 온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가 이를 진두지휘하여 장산포와 충청도 성호포·염성포, 그리고 경기 아산만 고온포 등을 중심으로 바닷길을 측정하고 해도를 작성했다. 하나부사는 1879년 정월 제물포에 도착, 이곳에서 1주일 동안 머물며 몇 차례에 걸친 답사를 토대로 만든 의견서를 제출하여 제물포를 개항장으로 할 것을 주장한다. 그 주요 내용을 보면 제물포가 영종·대부 등 여러 섬들에 둘러싸여 있어 풍랑이 있더라도 내항에까지 미칠 걱정이 없어 대형 선박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고, 제물포와 월미도 사이에는 썰물 때에 한줄기 수로가 형성되어 있으며, 제물포 연안은 밀물 때 수심이 깊어 군선이 접안하여 화물들을 실어 나르는 데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서울과 가까워 여러모로 편리한 곳이므로 서해안에서 최적지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기초로 일본은 조선정부에 제물포를 개항장으로 지정하여 요구하였다. 이에 정부는 ‘인천은 도성의 인후(咽喉)에 해당하는지라, 만약 개항이 되면 인심이 몹시 소란해질뿐더러 수륙 물자 반입이 혼란해지고 도성의 시화(市貨)가 분명 곤궁해질 것이다. 따라서 인천의 개항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교섭을 거치면서 조선측의 반대는 점차 누그러지고 끝내는 미곡 수출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 아래, 조계 지점, 부두의 위치, 해관 등에 관한 사항은 따로 결정하자는 일본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1882년 9월 개항하기로 결정하였다가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는 바람에 개항이 연기되어 1883년 1월에 개항이 이루어졌다.

개항과 더불어 지계(地界)를 설정한 일본 상인들은 잠시 동안 인천 지역 상권을 독점했지만 뒤이어 들어온 청나라 및 구미 제국 상인들과 치열한 경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점차 일본측이 우위를 점하게 되어 인천항의 무역 거래는 일본 중심으로 크게 늘어나게 된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이후 인천항의 무역은 경기가 좋아져 무역액이 2,000만 원을 넘게 되었다. 쌀 2가마 가격이 1원이 채 안되었던 때였음을 감안하면 대단히 큰 규모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에 전국적으로 개항되었던 8개의 항구(인천·부산·원산·군산·목포·마산·진남포·성진) 중에서 인천항이 총 무역액의 44%를 점유하였다고 한다.

 


 

풍도해전

1894년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청나라 모두 개입에 나섰다. 청나라는 여전히 조선과의 기존 종주권적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고, 일본 역시 조선을 영향권 내에 넣기를 원했다. 이때 양국은 이미 조선 영토 내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풍도해전은 1894년 7월 25일 아침 일본 해군이 아산만 부근 풍도 서남해역에서 청의 군함을 공격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청은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에 순양함 제원(濟遠), 포선 광을(廣乙), 연습선 위원(威遠), 운송선 조강(操江) 등을 파견하였다. 그중 제원호는 방백겸(方伯謙)이 지휘해 병력을 운반하던 고승(高陞) 등의 영국 상선을 호송해 조선의 아산만 일대로 진출하였다.

청의 함대가 아산만 일대에 다다르자 일본대본영은 함대 사령관 이토오에게 비밀 작전을 하달하였다. 기습공격을 통해 청의 함대를 격파하여 청의 기세를 꺾으라는 것이었다. 이토오는 여순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안산 앞바다의 풍도 인근에 전함 15척, 수뢰정 6척을 숨겨놓았다. 그리고 추가로 순양함 요시노[吉野], 아키츠시마[秋津洲], 나니와[浪速] 등 3척에게 풍도 앞바다 수색작전을 명하였다.

7월 25일 오전 7시 52분 경 일본 순양함 3척은 중국으로 돌아가던 제원호·광을호와 마주쳤다. 제원호는 청프 전쟁 당시 독일에서 건조된 것으로 철갑선 정원이나 진원보다는 작은 군함이었다. 그리고 광을호는 연습 항해 도중 동원되었다. 청의 함대에 접근하고 있던 일본 전함은 4천 톤 급 규모로 300밀리 함포 8문을 장착한 전함들로 우수한 독일 기술의 도움을 받아 막대한 군비를 들여 진수시킨 일본 최정예 전함이었다.

일본 군함이 청 군함에 비해 전력이 우세한 가운데 갑작스레 양국 함선 간에 격렬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제원호는 일본 군함의 포격에 타격을 입었다. 제원호는 부서진 채로 요시노호의 추격을 간신히 피해 여순항까지 갈 수 있었다. 광을호는 철갑옷을 입힌 목재선인데 일본 군함에 돌진하였으나 아키츠시마호와 나니와호의 압도적 화력에 밀려 도망치다가 격침되었다.

같은 시간 조선에 파병될 두 번째 병력을 싣고 영국 국기를 단 고승호와 무기를 실은 조강호가 이동 중이었다. 고승호는 1883년에 건조된 영국 국적의 상선으로, 청이 군대를 조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대여한 것이었다. 7월 23일 새벽 출항할 때 청군 약 1,200명과 대포 12문을 적재하고 아산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7월 25일 오전 8시 전후 나니와호는 해상에서 고승호를 발견하자 검문하려 하였다. 양측은 실강이를 벌이던 중 오후 1시 나니와호가 고승호에게 어뢰를 발사하고 동시에 대포와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공격하였다. 결국 고승호는 침몰하였고 배안에 있던 1,200여 명의 청군 중 1,000명이 사망하였다. 고승호가 일본 군함에 겁박되어 있는 것을 본 조강호는 회항을 시도하다 아키츠시마호의 추격을 받아 결국 오후 2시경 포획되어 일본의 항구로 압송되었다. 풍도해전은 일본의 대승으로 끝났고 일본은 이후 서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비슷한 시기인 1894년 7월 28일 청일 양군은 소사벌과 성환 부근의 홍경평에서 격돌하였다. 싸움은 밤을 새워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되었으며 사전준비가 철저하였던 일본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철도부설

서울은 조선시대 이래 수백 년 동안 한강을 통한 수운으로 물자를 수송하였으나, 개화와 산업발전을 위해서는 서울을 항구와 직접 연결해주는 새로운 대량수송 수단이 필요하였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인천 제물포가 1883년에 개항되면서 서울과 연결되는 경인선 철도가 구상되었다. 미국과 일본이 철도 부설권을 놓고 경쟁하였으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된 이후인 1896년 3월 철도부설권은 미국의 기업가 모스(J. Morse)에게 넘어갔다. 모스는 조선정부와 ‘경인철도특허조관’을 체결하고 1897년 3월 경인가도상의 우각현(牛角峴, 지금의 인천시 동구 창영동 도원역 부근)에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부설권을 뺏기 위한 공작을 벌여 조선이 정치적으로 어지럽다는 거짓 소문을 미국에 흘렸고, 이로 인해 미국 투자가들이 자금을 회수하게 되어 모스는 자금난에 봉착하였다. 여기에 기술적 문제까지 겹쳐 공사가 중단되었다. 결국 1898년 5월 170만 원(당시 100만달러)에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에게 부설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1899년 9월 18일 33km 구간의 경인선 철도가 완공되었다. 이후 1900년에는 한강철교의 완성과 함께 노량진에서 서울까지의 연장구간이 개통되었다. 개통 당시 인천역에서 노량진역까지의 소요시간은 1시간 40분, 하루에 2번 왕복하였고, 서울까지 연장 개통된 후에는 5번 왕복으로 늘어났다. 표정속도(表定速度)는 19.8km/h였다고 한다.

일본은 1880년부터 1906년까지는 한반도 종관선을 완성하는 한편 자신의 철도경영권을 확립하였고, 1906년부터 1925년까지는 만주침략정책을 효율화하기 위해 조선철도를 남만철도주식회사에 위탁·경영하다가, 1925년부터는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철도운영을 담당하였다. 1926년에는 ‘조선철도 12년 계획’을 수립하여 식민지 지배체제 확립과 식량과 자원을 수탈하고, 대륙 진출의 통로를 확보하고자 하는 야욕을 드러냈다. 이 계획의 핵심은 국유철도 5개선 860마일을 신설하고, 기왕에 부설되었던 주요 사설철도 5개선 210마일을 매수하여 국유화한다는 것이었다. 본래 조선에서의 사설철도는 국유철도 건설에 따르는 재정상의 제약을 타결하고 식민지 수탈에 필요한 철도망을 신속히 완성하기 위해 민간에 그 건설과 운영을 장려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수인선(수원-인천) 역시 일본의 전체적인 철도 계획 아래 사설철도로 건설되었다. 부설 및 운영을 맡은 회사는 경동(京東)철도주식회사였다. 수인선은 1937년 7월 19일 개통되어 1995년 12월 31일까지 58년간 인천과 중부내륙 지역 사이의 여객과 화물운송을 담당하였다. 인천시에서 동남으로 경기도 시흥시, 안산시를 거쳐 수원역에 이르는 52km의 철도이다. 구간 대부분이 경기만으로 내려 뻗은 낮은 구릉지대를 관통하고 있다. 수인선은 1930년 개통된 수여선(수원-여주)과 연결되어 강원도와 경기도 내륙의 물자 및 여객수송을 담당하였다. 철도 개통 이전 하루 1~2편의 버스에 의존하던 것에 비하면 개통 후의 인적·물적 교류 증가는 폭발적인 것이었다. 경동철도는 늘어나는 화물을 감당하기 위하여 창고시설과 인입선(引入線)을 확충하고 역사(驛舍)를 증축하였다.

수인선은 해방 후 적산(敵産)으로 미군정에 접수되어 1946년 5월 여타의 사철(私鐵)과 함께 국철로 흡수되었다. 1950년대부터 도로교통이 발달하면서 점차 그 기능이 쇠퇴되어 갔으나, 1972년 수여선 폐선 이후에도 명맥을 이어가다가 결국 1994년 송도-한양대앞 간 26.9km폐선되었고, 1995년 한양대앞-수원 간 20km가 폐선됨으로써 그 수명을 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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