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대결과 평화의 교차점 경기만 | 경기만 에코뮤지엄

경기만의 유산


남북 대결과 평화의 교차점 경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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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 몸부림치며 고대하던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일제 패망의 직접적인 계기는 연합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데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 대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 뒤에는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민족의 불행이 도사리고 있었다.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기 위하여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군사분계선 38도선은 민족분단선으로 굳어 버렸고, 이로 인해 한국은 지금까지도 이념과 체제를 달리 하는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어 있다. 38도선은 서해안의 웅진반도, 경기도에서는 장단·연천·포천·가평을 남북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남북한에 독자적인 정권이 수립되고 군사적 대결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새벽 옹진반도를 비롯한 38선 전 지역에서 북한군이 전면 남침함으로써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옹진반도에서 개성·문산·의정부에 이르기까지 서부와 중부의 38도선을 접경하고 있는 경기도는 전쟁 발발부터 격렬한 전쟁터였다. 경기도는 남과 북의 군대가 진격과 후퇴를 거듭할 때마다 주요한 통로 및 격전지가 되었다. 6·25전쟁은 민족 전체에게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안겨준 참혹한 비극이었으며, 특히 경기도민이 입은 손실은 인명 피해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막심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경공업지역이었던 경인공업지역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조인된 뒤 경기도는 전쟁 전과 마찬가지로 남과 북을 가르는 휴전선에 의해 분단을 상징하는 지역이 되었다.

경기만 일대는 인천상륙작전 등에서 보듯이 전략상의 요충지로서 유엔군과 북한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곳이며, 휴전 이후에도 현재까지 해상북방한계선(NLL)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대립과 충돌을 반복한 곳이기도 하다.

 


 

6·25전쟁의 반전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판도를 뒤집고 유엔군이 승기를 되찾은 작전이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D. MacArthur)가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해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구상을 수립한 것은 이미 1950년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때였다고 한다. 맥아더는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천을 고집했다. 그러나 인천 일대는 몇 가지 이유로 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구불구불하고 협소한 수로, 한정된 진입로, 엄청나게 큰 조석차(潮汐差), 상륙해안의 악조건, 요새화된 월미도 등이 걸림돌이 되었다. 참모들은 안전한 군산이나 아산만을 제의했으나, 이곳은 당초 상륙작전의 목적인 보급선 차단이나 북한군 포위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맥아더는 끊임없이 인천 상륙을 주장했다.

결국 미 합동 참모 본부는 8월 28일 맥아더의 계획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인천 상륙과 동시에 낙동강선에도 반격을 취한다는 계획이 채택되어 9월 15일을 상륙 예정일로 하는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맥아더의 미 10군단 7만 5천여 병력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 상륙단의 선견 공격대가 인천수로로 진입한 후 고속 항모 부대의 함재기들이 월미도와 인천 내륙 지역에 맹렬히 폭격을 퍼부었다. 그 뒤를 이어 구축함의 초탄이 월미도에 작렬하였고, 로켓포함이 녹색 해안과 주변 진지에 1,000여 발의 퍼붓는 동안 상륙정 7척이 해상에 설정된 공격 개시선을 통과하였다. 새벽 2시 시작된 상륙작전으로 오전 8시 월미도를 확보하였고, 오후 만조시 미 해병 제1·5연대 전투단을 태운 함정들이 인천 수로를 따라 인천항으로 접근, 오후 5시 33분 적색 해안에 상륙하였다. 인천에 상륙한 병력은 약 13,000명이었다. 월미도는 인천까지 약 600m의 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월미도를 장악한 미 제5해병연대는 소탕전을 벌여 북한군 108명을 사살하고, 106명을 포로로 잡았다. 인천 시가지 소탕 작전은 국군 해병 제1연대가 담당하였다. 연대는 이날 시내의 주요 공공시설을 장악하고 야간에는 시내외 요소요소에 대한 경비와 순찰 강화, 소탕 작전 등을 벌였다. 첫날 한국 해병 제1연대의 전과는 포로만도 181명에 달했다.

미 제5해병연대는 김포비행장을 탈환한 후 국군 해병대와 합세하여 행주나루로 향했으며, 이날 미 제1해병연대도 소하를 통과, 다음날에는 영등포 근처까지 진격했다. 9월 18~19일 인천에 상륙한 국군 제17연대와 미 제7사단 32연대는 영등포 남쪽으로, 미 제31연대는 수원방면으로 신속하게 진격하여 각각 서울 수복과 북한군의 퇴로 차단 작전에 돌입하였다. 미 해병대와 한국군은 서울 탈환을 목적으로 동진하였고, 미 제7사단은 남진하여 북상하는 유엔군과 오산에서 합류함으로써 북한군은 남북으로 절단되었고, 한반도의 중부 및 동부 산악 지대로 패주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상륙군 부대인 제7합동기동부대가 인천으로 항진하면서 보조를 맞추어 9월 4일부터 상륙시까지 공중 폭격이 계속되었다. 사전 항공 폭격은 상륙 지역과 일자를 기만하기 위해 북으로는 평양으로부터 남으로는 군산까지 인천을 포함한 서해안의 상륙 작전 가능 지역에 고루 폭격하되 객관적으로 상륙이 가장 유력시되는 군산에 맹폭격을 가해 북한군의 대응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해상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과 남북 갈등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에서는 남북한간 육상경계선만 설정하고 해양경계선은 설정하지 않았는데, 당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M. Clark)가 정전협정 직후인 1953년 8월 30일에 설정한 해상한계선이다. 이 선은 서해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의 5개 섬 북단과 북한 측에서 관할하는 옹진반도 사이의 중간선을 말하는 데, 북위 37°35′과 38°03′ 사이에 해당한다.

당시 유엔군측이 이 선을 설정한 이유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북한 도발을 막기 위한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유엔군이 명명한 북방한계선이란 명칭에서 보듯이 이 한계선은 당시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북한 해군의 남진을 막는 남방한계선으로 이름 짓지 않고, 군사적으로 우수했던 한국 해군의 북방 진출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NLL은 휴전 후 1970년대 초기까지 북한이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가 갑자기 1973년 이 선이 유엔군 사령관에 의해 임의적으로 지정된 선이라며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북한은 국제법상의 영해 규정에 따라 현재의 북방한계선보다 남쪽으로 위치하는 해상 경계선을 주장하고 있다. 이후 북한은 NLL 인근에서 1970년 우리 해군 수송선 납북, 1985년과 1987년 잇달아 어선을 납치하는 등 갈등을 야기한 바 있다.

현재 우리 정부는 북방한계선이 수십 년 동안 지켜져 왔으며, 유엔군 사령부가 NLL 확정에 대해 통보했을 당시(통보 근거는 불확실함) 북한 측의 분명한 이의 제기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1992년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 9조의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하기로 한다. 해상불가침구역은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해온 구역으로 한다’고 규정한 점을 들어 이를 침해할 경우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부속합의서 제10조의 조항에 따르면 남북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고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의 기준이 명확히 NLL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 논란의 여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NLL에 대하여 정전위원회를 통한 구두 주장이나 문서 제출 등과 서해해상에서의 실제 행동으로 지난 40여 년 동안 계속 무효를 주장해왔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현재의 남북 관계에서는 NLL 문제를 논리적 합의를 통해 해결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서해 해전, 연평도 포격사건 등 북한의 도발과 군사적 충돌로 인해 남북의 정치적·군사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파문 등 우리 내부의 논란과 갈등도 심화되었다. 서해 5도 주민들을 비롯한 경기만 일원의 어민들도 직간접적으로 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

NLL에 대한 쌍방의 논리나 이와 관련한 실효적 지배를 강조하는 논거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남북이 NLL을 합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상경계선 문제를 지금 다시 논의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남북 간 평화정착만이 문제 해결의 유일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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